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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상식

Volkswagen- 세계 1위 자동차 판매 회사

by 커피 한잔의 여유 2022.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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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녕하세요.커 피 한잔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요즘, 따뜻한 커피 한잔 여유있게 드시면서 딱정벌래 차량으로 유명한 비틀 자동차를 생산한 폭스바겐 자동차 회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폭스바겐은 독일어로 (Volk):국민⁕ (s):합성어 결합 요소⁕ (Wagen):자동차, 즉 모든 국민이 사용할 수 있는 자동차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일 니더작센주 볼프스부르크에 본사가 있습니다.

아우트슈타트는 폭스바겐 사가 도시전체를 자동차 테마파크처럼 만든 곳이다

2. 폭스바겐의 탄생과 히틀러 그리고 비틀

 

1920년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매우 가난한 상황에 초인플레이션(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극심한 인플레이션 현상-물가가 극단적인 속도로 상승하는 현상)까지 겹친 상황이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1933년 독일 총리가 된 히틀러는 "국력은 철도 길이가 아니라 고속도로의 길이로 평가받을 것이다"라며 흔히 알고 있는 아우토반의 건설을 지시하였으며, 이로 인해 실업자는 대폭 감소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고속도로를 운행하는 차가 당연히 있어야 하는 법!, 그래서 히틀러의 지시로 국민차 비틀 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모든게 히틀러의 전쟁하기위한 작전인 것입니다.

1930년대에 히틀러는 고급 승용차 중심의 사회에서 벗어나 전 국민이 탈 수 있는 보급형 차량을 생산하기 위해, 페르디난트 포르쉐를 만난 저녁 만찬 자리에서 미술을 전공했던 히틀러는 종이가 없어 냅킨 한 장에 자동차 시안을 그려주었는데, 지금의 비틀의 시초인 딱정벌레 모양을 가리키며  자연에게서 배워야 한다며 딱정벌레 모양의 자동차를 제작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국민차의 조건으로 "어른 2명과 아이 2~3명은 충분히 탈 수 있어야 하며, 7리터의 연료로 100km를 갈 수 있어야 하며, 차량 가격은 1,000마르크 이하 여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히틀러는 자연을 몹시 좋아했으며 "무언가를 능률화하려면 자연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라며 주장했지만, 비틀(kdf-바겐)은 사업목적이 아닌 사회적 계획으로 시작된 차량이었습니다.

kdf-바겐(kdf-Wagen) 차량은 슈투트가르트 공장에서 포르쉐 박사가 만들었습니다.

1920년 창당한 나치당의 노동자 기관인 독일 노동전선 DAF(Deutsche Arbeitsfront) 산하에 공공 레저 기관으로 1933년 kdf(kraft durch freude(국영 여행사))를 설립합니다.

kdf는 나치 정권에서 사는 것이 행복하게 해 줄 목적으로 만들어진 히틀러의 가족 여가 활동 부서이며, 타이타닉 크기의

크루즈 선등 거대한 휴양지(프로라 리조트: 2만 명을 수용 가능)등을 만들고, 착실하다고 판단되는 독일인 가족들을

대상으로 무료 여행을 보대 주었습니다.'국민 자동차 프로젝트', "일주일에 5 마르크면 저축하면 차를 이용할 수 있다" 면서 저축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으며, 당시 일주일 평균 생활비는 32마르크 정도였습니다

 

kdf-바겐 공장 기공식. 연설 중인 히틀러

1938년 폭스바겐 공장이 가동되던 해에 수백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kdf 금고에 돈을 채워 넣었습니다.

비극적인 비틀 저축 책략은 거대 신용 대사기극에 불과했습니다.

히틀러는 다른 목적으로 돈을 모았던 것입니다.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휴양지는 열리지 않고, 자동차에 투자한 시민은 그 누구도 비틀은 받을 수없었으며, 폭스바겐 공장은 전쟁 군수 용품을 생산하였고 비틀의 새시를 기반으로 퀴벨바겐과 슈빔바겐을 제작하였습니다.

독일의 패배로 전쟁은 마무리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kdf-바겐 공장이 파괴하였고. 1945년 종전 이후 영국의 장교가 kdf바겐 공장을 찾아냈습니다.

독일은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kdf-바겐의 공장과 기술 제공을 제안했지만 미국과 영국은 이를 모두 거절합니다. 독일은 엄청난 기회(현재 독일이 자동차 강국)를 맞이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또한 영국 장교였던 이반 허스트(Ivan Hirst) 대령은 폐허로 인해 생계가 막막해진 독일인들의 처지를 가엾게 여겨 남아 있는 생산 설비 시설에 독일 노동자를 모아 독일 주둔 영국군에게 납품할 차량 생산을 재개하도록 합니다.

이로 인해 이미 생산 예정이었던 설계대로 kdf바겐이 아니라Volkswagen type 1이란 이름으로 생산을 하였습니다.

1945년 1,700여대을 생산되었고, 점차 모든 시설이 정상화되면서 1946년 까지는 거의 대부분 영국군에게 납품되었으며, 독일의 경제가 서서히 복구가 되면서 이후부터는 일반 독일 시민들에게도 공급이 되기 시작하였고, 점차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폭스바겐 비틀은 저렴한 가격, 좋은 내구성, 괜찮은 성능을 자랑하며 누적 2,200만 대 이상 판매량을 기록하였습니다.

이후 폭스바겐은 나치 수용 독일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강제노역을 시켜 군용차, 수륙양용차 등 군수품을 생산해 납품한 전범기업이 이었습니다.

특히 폭스바겐의 팔러스레벤 공장은 노이엔감메 강제 수용소 하의 수용소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폭스바겐은 보육 시설을 만들어 강제 수용소 수감자의 아이들을 수용했으나 관리가 미비한 나머지 수많은 아이들이 질병이나 기아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에 대해 폭스바겐은 한 동안 다른 전범기업들과 마찬가지로 강제 노역에 대해 전쟁의 불행한 결과이며 나치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다가 1991년부터 강제 노역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1200만 마르크를 기부하면서 배상을 시작하였고, 이듬해인 1992년 폭스바겐 이사회는 홀로코스트의 고령 생존자들을 돕는 이스라엘 단체의 재정 지원에 노력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또한 2000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가 '기억, 책임과 미래재단'이라는 강제 노역 피해자 배상 재단을 설치해 이곳에 기부하고도 했습니다.

 

3. 포르쉐 가문- 피에히 가문

 

독일 비틀 자동차를 만든 페르디난트 포르쉐로 부터 시작됩니다. 포르쉐 박사의 아들인 페리 포르쉐는 포르쉐 회사를 물려받고, 딸인 루이제는 폭스바겐 회사를 물려받았습니다.

이 가문의 대립과 경쟁은 손자와 외손자에 이어 3대를 이어졌습니다.

1. 포르쉐 가문

1951년 포르쉐 박사의 아들 페리 포르쉐가 포르쉐 회사의 실질적인 경영주로 활동하였고, 가족들 역시 가족 회사에서 오는

폐단을 의식하였기에 회사를 떠났습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친손자인 페리 포르쉐(포르쉐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킴)의 장남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는 독일 슈가트가르트에 포르쉐 디자인을 세워 독립하였고,그는 포르쉐에 디자인 문화를 가져온 사람으로 오늘날 스포츠카들의 형태를 만들어낸 사람' 이란 평가를 받았으며, 동생인 볼프강 포르쉐는 처음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2007년 벤델린 비데킹의 후임으로 포르쉐의 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 피에히 가문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딸인 루이제 포르쉐는 안톤 피에히와 결혼하여 피에히로 개명하였습니다.

그녀는 포르쉐 가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에 살면서 폭스바겐과 포르쉐의 유럽 내 판매망을 구축을 하였습니다. 결단력 있는 사업가이며, 히틀러의 지시로 폭스바겐을 설계한 전범으로 2년 감옥살이를 한아버지 페르디난트 포르쉐를 위해서 더욱 더 사업을 번창시켰으며, 훗날 폭스바겐을 경영하게 됩니다.

이후 둘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가 바로 유명한 아우디를 세계적으로 알린 페르디난트 피에히입니다.

그는 외할아버지인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명석한 두뇌와 손재주, 어머니인 루이제의 사업가 기질을 모두 물려받았습니다. 현재 폭스바겐-아우디 회장이며 폭스바겐을 세계 1위의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4. 자동차계의 문어발

 

1. 아우디

1909년 설립 - 1932년 아우토 유니온 연합 회사를 설립(아우디의 전신) - 2차 세계대전 종전 - 벤츠의 자회사로 편입됨

- 폭스바겐이 완전 인수 - 1964년 폭스바겐의 자회사가 됩니다.

2. 세아트

1950년 스페인 국립산업연구소에 의해 설립 - 초기 이탈리아 피아트 차량을 생산 - 스페인 국민 브랜드로 자리매김- 피아트와의 계약 종료 - 1980년대 폭스바겐과 포르쉐로 부터 기술협력과 이탈리아 디자인 등 제휴관계 - 1990년 폭스바겐 자회사가 됩니다.

3. 스코다

1895년 체코산 브랜드이며 유럽에서 자전거 회사로 설립 - 10년 후에 자동차 제조 시작 - 체코슬라바키아의 공산화로 국영기업으로 전환 - 우수한 품질로 유명 메이커로 운영됨 - 냉전 종식 이후 민영화를 추진 - 폭스바겐 협력 계약 - 1991년 폭스바겐의 자회사 - 실용성 위주의 기본기에 집중한 차량으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합니다.

4. 람보르기니

황소 표 슈퍼카 설립된 이후 1년 만에 페라리를 능가하는 350GT가 등장 - 미우라, 쿤타치, 디아블로,  가야르도, 우라칸 등 명차 생산 - 경영난으로 크라이슬러 매각 - 1998년 폭스바겐 자회사 - 슈퍼카 포지션 담당하고 있습니다.

5. 폭스바겐 상용차(VWCV)

독일의 상용차 브랜드이며 독일의 상용차 제조사인 만(MAN)과 스웨덴의 상용차 제조사인 스카니아((Scania), 폭스바겐 트럭& 버스(Volkswagen Truck & Bus AG)를 관리합니다. 만과 스카니아는 폭스바겐의 자회사입니다.

6. 벤틀리

1919년 설립된 럭셔리 자동차 제조사 - 경영난 악화로 롤스로이스가 인수 - 비커스가 롤스로이스를 인수 - 1998년 폭스바겐의 자회사가 됩니다.  -BMW는 롤스로이스를 인수하면서 서로 간의 치열한 경쟁은 마무리가 됩니다.

7. 두카티

바이크계의 페라리는 1926년 두카티 형제가 설립 - 무선기에 필요한 부품 등을 판매하는 작은 회사 - 자전거에 엔진을 부착(오토바이 쿠치올로) 제작 - 1960년 급격한 기술 성장으로 명성을 떨침 - 2012년 아우디가 1조 이상 지불하고인수하였습니다. 당시 아우디 회장이었던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두카티에 대한 애증이 남달랐다고 합니다.

 

5. 중국에서 가장 사랑받다

 

폭스바겐 전체 매출의 40%를 차지하는 중국 시장은 성장세가 멈추지 않고 지금도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의 개방을 통해 산업화 의지와 기술 이전을 통해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려는 폭스바겐의 뜻과 맞물리면서, 대외적으로 외국 자본 및 기술에 대한 개방을 추구하는 중국은 타 산업과 연관 효과가 높은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외국기업의 직접투자를 장려했습니다.

단, 100% 지분 투자를 금지하고 중국 기업과 50% 이내의 합작 투자만을 허용하는 정책을 내세우며 자동차 산업 육성을 위해 기술 이전과 부품의 현지 조달의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이런 조건에 처음엔 글로벌 자동차 업체는 중국 소득 수준이 너무 낮아 수요가 없으며, 기술 이전을 하면서 투자할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상황이었지만, 폭스바겐은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 이득이 큰 것이라 보았고, 세 가지 요구 조건을 걸고 시장에 중국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중국 정부와 국영기업에서 사용하는 관용차를 폭스바겐을 선정해야 하며, 다른 외국 자동차 업체의 중국 내 투자를 제한하며, 부품의 관세를 낮춰서 완성차를 수입할 때 관세를 올려달라는 조건이었습니다.

1985년 상하이자동차와 제휴하여 상하이 따종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2016년 폭스바겐은 중국 장화이자동차와 제휴하면서 중국 전기자동차 분야에도 진출하게 됩니다.

 

6. 디젤 게이트- 클린디젤 그리고 미래

 

디젤 게이트는 폭스바겐을 비롯한 유럽 자동차 회사들이 유해한 질소산화물 배출로 비판받아 배출 가스양을 조작해 온 사실이 2015년 뒤늦게 발각되면서 밝혀진 사기 행각을 벌인 것입니다.

디젤 자동차는 가솔린 자동차에 비해 인체에 치명적인 질소 산화물(NOx) 배출 비율이 수백 배나 높아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후 2000년대부터 폭스바겐 등 유럽 자동차 회사들은 기술의 발달로 오히려 가솔린보다 청정하다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였지만 처음엔 이 말을 믿기 시작했지만 자동차 전문가들은 오히려 의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테스트에서 조작된 결과가 나왔고, 클린 디젤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사기 행각을 벌인 겁니다. 하지만 2015년 배출가스 조작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맨 먼저 클린 디젤을 앞세웠던 회사들이 사람들을 속인 것이 들통나면서 디젤 자동차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지만, 유럽에선 오히려 디젤뿐만 아니라 가솔린 등 모든 내연기관이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로 역공으로 나선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내연기관의 퇴출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유럽에 비해 엄격한 미국 배출 기준을 업체에서 충족할 수 있다는 희망에 시험을 진행하였는데 이 시험은 단지 문제점을 발견하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미국 디젤은 독일 디젤보다 좋을 것이다'라는 것의 결론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하지만 이미 발표된 데이터와 너무나 다른 데이터로 인해 수차례를 반복 시험을 했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이 미국에선 휘발유 가격이 워낙 저렴한 관계로 디젤 승용차 거의 팔리지 않아 전체 1% 정도에 불과 했으며, 만약 2005년 미국의 배출 기준을 맞추기 위해 대당 355달러의 질소산화물 저감장치를 설치를 했다면 사기행각도 들키지 않았을 것이고, 대당 35,000달러의 벌금도 아꼈을 것이며, 천문학적인 벌금까지,,, 세상 일이란 정말 알 수 없는 듯합니다. 미국에선 120억 파운드, 약 19조 원에 달하는 합의금을 포함, 법적 비용 등 260억 파운드, 약 41조 원을 지출하면서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현재도 다른 국가와의 합의는 진행 중입니다.

폭스바겐은 전기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위한 전략으로 전기차 전용 MEB 플랫폼인 일렉트릭 포 올(Electric for all)을 발표하였고, 전략은 '개방'입니다.

단순히 폭스바겐그룹 내에서만 활용하는 것이 아닌, 외부와 효용 가치가 극대화할 수 있다면 공유한다고 했습니다.

독일의 이고 모바일에 MEB 플랫폼을 공급하기로 했으며, 다양한 품종을 생산할 수 있는 수익 창구를 만들었으며, 전기 자동차 플랫폼까지 판매하여 플랫폼 시장을 개척해 나가고 있습니다.

폭스바겐은 첫 양산 전기 SUV ID.4를 현재 판매 중입니다.

폭스바겐은 전기자동차만 초점을 두고 2033년부턴 유럽에서 내연기관 자동차 생산을 전면 중단을 선언했으며, 미국의 자동차 생산 1위인 제너럴모터스(GM) 역시 구조조정과 함께 전기 자동차 생산에 주력한다고 합니다.

 

이상 폭스바겐에 대한 내용을 마치겠습니다.

생각보다 내용이 길어서 지루했겠지만 역사 이야기를 줄이는 것 역시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다음은 유럽 자동차 브랜드?, 슈퍼카?, 아님 아시아? 조금 더 정리해서 찾아뵙겠습니다.

 

커피 한 잔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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